Ⅰ. 서문
01. 삼일신고( 三日神誥) 역사
우리 민족의 옛 경전인 <삼일신고, 三日神誥>가 환웅천왕 시대인 기원전 3897~3804년경에 문자로 기록된 것이라 하므로, 이것이 사실이라면 기에 대한 최초의 기록으로는 중국의 <황제내경>보다 길게는 3천5백 년, 짧게는 1천2백 년을 앞선 것이 된다. 적어도 기와 그것의 수련에 대해서만큼은 우리나라가 그 시원 국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연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우리나라는 예부터 불가의 스님들 외에도 수많은 진인과 선인들이 살았던 도향(道鄕)이었다.
02. 삼일신고가 전하여 내려온 내력
본 삼일신고(三一神誥)는 고구려의 멸망 시, 그 유신(遺臣) 대조영이 민족의 경전(經典)인 신사기(神事記) 등을 품고, 말갈의 땅으로 도피하여, 발해국을 일으켜 세운 뒤, 지난 역사에 전란(戰亂)으로 민족의 경전이 없어진 경우를 생각하여, 항상 잘못될까 염려하던 중, 영원히 없어지지 않게 하려고, 신사기(神事記)와 임금이 지은 삼일신고 예찬(三一神誥禮讚)을 첨부한 삼일신고(三一神誥) 해설집 등 민족의 경전을 보본단(保本壇) 돌 집속에 간직하여 두었던 것이다. (단기 3,031(서기 968)년 대흥 3년 3월 15일)
그 후 1,000여년이 지난 조선말에 민족종교의 교맥을 이어 중광(重光)한 단군교(檀君敎) 초대 대종사(一代 大宗師)가 되신 백봉신형(白峯神兄)이, 십년을 하늘 님께 원도하여 대황조(大皇祖) 단군성신(聖神)의 묵계를 받으시고 보본단 돌집을 찾아내어, 그 속에서 민족경전과 단군실사(檀君實史)를 얻으셨다. 그리하여 백봉(白峯) 대종사는 단기 4237(서기1904)년 갑진(甲辰)년 음력 10월 3일 백두산 대숭전(大崇殿) 동무고경각(東無古經閣) 단군교 본부에서 13인의 제자들이 자리를 같이하여 작성하고 서명한 단군교 포명서(檀君敎布明書)를 공포하고, 그후 13인의 제자들을 13도에 배치하여 단군교 포명서를 선포케 하였으며, 또 20인의 제자들을 동원하여 요동, 만주, 몽고 및 숙신, 여진, 말갈, 거란, 선비구강에 이르는 청(淸)나라와 일본 등 각지로 파송하여, 단군교 포명서를 선포하게 하였던바, 이듬해 단기 4238(서기 1905)년 섣달 그믐날 밤(서기 1906년 1월 24일) 백봉대종사는 90고령의 두암백전(頭巖白佺)선옹을 보내어 구국운동으로 일본을 다녀오는 홍암(弘岩)나철(羅喆)에게 서울 서대문역에서 만나, 삼일신고해설집과 신사기(神事記)를 전하여 주었다.
그러나 홍암나철(弘岩羅喆)은 당시 구국(救國)의 정치 외교행각에만 관심이 집중된 때인지라 별로 관심 없이 집에 가져다 놓았다고 한다. 그 후 단기 4241(서기 1908)년 12월 5일 정훈모 동지와 홍암나철은 4번째로 일본에 건너가 구국외교의 정치행각을 위하여 동경 청광관에 머물 때, 백봉대종사가 두 번 째로 보낸 미도두일백(彌島杜一伯)선옹이 찾아와, 단군교 포명서를 비롯하여 고본신가집(古本神歌集), 입교의절(入敎儀節), 봉교절차(奉敎節次), 봉교과규(奉敎課規) 등의 책을 전하면서,「라공(羅公)과 정공(鄭公)이 금후에 할 일은 단군교포명서 선포(宣布)에 관한 일이니 명심하시오.」하고 떠났다고 한다.
그러나 그후 홍암나철 일행은 일경(日警)의 탄압을 피하여 숙소를 개평관으로 옮겼는데, 미도선옹이 새벽같이 또 찾아와 엄숙한 표정으로, 「국운(國運)이 이미 다 하였는데 어찌 바쁜 시기에 쓸데없는 일로 다니시는가? 곧 귀국하여 단군대황조의 교화(敎化)를 펴시오. 이 한마디가 마지막 부탁이니 빨리 떠나시오.」하고는 바람같이 떠났다고 한다.
비로서 홍암나철은 대오대각(大吾大覺)하였으며, 그 길로 귀국하여 이듬해 단기 4242(서기 1909)년 음력 1월 15일, 종로구 재동 한 초가집에서 “대황조 단군신위(大皇祖檀君神位)”의 위패(位牌)를 북벽에 모시고 단군교 서울시교당을 차리고, 수십 명의 동지들과 단군교(檀君敎) 포명서(佈明書)를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단기 4243(서기 1910)년, 일본이 우리나라를 병탄(倂呑)하면서 한일합방을 지지하는 성명을 내도록 압박하고 탄압하자, 홍암대종사는 단군교(檀君敎)를 대종교(大倧敎)로 개명하여, 탄압을 피하여 만주로, 대종교 총본사를 옮기었다. 그러나 정훈모 선생을 비롯한 일부 교우들은 교단 개명을 반대하고, 단군교 교명을 지키며, 안양 시교당을 중심으로 포교 활동을 하게 되었다. 결국 단군교는 대종교와 단군교로 갈라지게 된 셈이다. 이렇게 하여 신사기와 삼일신고 해설집 등 민족경전은 대종교와 단군교로 전하여 오늘의 이르게 된 것이다.
또 한편은, 계연수(桂延修)선생에 의하여 한단고기(桓檀古記)가 전해지면서 그 속에 천부경(天符經)과 더불어 삼일신고(三一神誥) 및 참전계경(參佺戒經)의 존재도 알게 되었다.
03. 머리말[三一神誥序]
-대야발(발해 고왕의 아우)-
신이 그윽히 엎디어 듣자오니 온갖 조화된 것은 형상이 있고 천지를 창조하신 참임자는 모습이 없느니라. 아무 것도 없는 데서 만들고 돌리고 진화시키고 기르는 이가 곧 한얼님이요, 형상을 빌어 나고 죽고 즐기고 괴로워하는 것들이 바로 사람과 만물이니라. 처음에 한얼님이 주신 성품은 본디 참과 가달이 없었건마는 사람이 그것을 받은 뒤로부터 순수하고 섞임이 있게 되었으니 비유하건대 백 군데의 냇물에 한 달이 같이 비치고 같은 비에 젖건마는 만 가지 풀이 다 달리 피어남과 같음이니라.
애닲다! 모든 사람들은 차츰 사특하고 어리석음에 얽히어 마침내 어질고 슬기로움에는 어두워지며 마음속의 완악한 불길이 세상 물욕을 끊이고 서로 다투는 허망한 생각의 먼지가 본성의 마음구멍을 가려 그로 말미암아 흥하는 듯 망하고 일어났다가는 꺼지는 것이 마치 아침 햇빛아래 노는 뭇 하루살이와 같고 밤 촛불에 날아드는 가엾은 나비를 면하지 못하거니 이는 어린 아들이 우물에 빠지는 것에만 비길 바 아니거늘 어찌 인자하신 아버지가 차마 이것을 바라만 보고 있을 것이랴, 이것이 무릇 큰 덕과 큰 슬기와 큰 힘을 가지시고 한배께서 사람의 몸으로 화하여 세상에 내려오신 까닭이시며 또 교화를 펴고 나라를 세우신 까닭이니라.
이 <삼일신고>는 진실로 머리속에 보배로이 간직한 가장 높은 이치요 뭇 사람들을 [밝은 이]가 되게 하는 둘도 없는 참 경전이니 그 깊고 오묘한 뜻과 밝고 빛나는 글이야말로 범인의 육안으로는 엿보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리라.
우리 임금께서는 본디 한울이 내신 이로 한얼님의 내려 주신 계통을 이어 나라 터전을 정하시고 예복을 입으시고서 한울의 말씀이 적힌 거룩한 책궤를 받들어 비로소 친히 보배로운 예찬을 엮으시니 오색이 은하수에 나부끼고 일곱 별들이 북극성에 둘리는데 이 때 사방 바다엔 물결이 잔잔하고 모든 나라 백성들이 편안해지니 어허! 거룩하시오이다.
신이 외람되이 모자라는 학식으로 감히 거룩하신 분부를 받드오니 재주는 한정이 있고 진리는 무궁하와 마음으론 말하고 싶사오나 입으론 미치지 못하오며 비록 이 글을 짓기는 하였사오나 태산에 티끌을 보태고 큰 못에 이슬을 더함과 다름이 없사옵니다.
천통(天統) 十七년 三월 三일
반안군왕(盤安郡王) 신 야발(野勃)은 삼가 임금의 분부를 받들어 머리말을 적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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