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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공안점검 02

by 단청의 무늬 2023. 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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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떤것이 불성(佛性)이냐?

자. 보라. 옛날 부처님께서는 일체 모든 중생이 유정 무정을 막론하고 
'모두 불성이 있다' 하였는데 조주스님께서는 '개는 불성이 없다'고 하였으니 
어떤 것이 옳은가? 
부처님이 옳은가? 조주스님이 옳은가?
 조주스님이 옳다면 부처님이 그른 것이고 부처님이 옳다면 조주스님의 말씀이 그르게 된다. 
자, 여기 한 마디를 던져보라.

초립쟁이가 만공스님을 찾아와 물었다. 
"옛날 조주스님께 어떤 중이 와서 묻기를,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니 
'개는 불성이 없느니라' 하여 '무(無)' 라 대답하였는데, 
스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 텃밭에 많이 있느니라."
나가보니 가을 텃밭에 팔뚝만한 무들이 가득 차 있었다.

조주스님께 어떤 중이 와서 물었다.
"스님, 불성이 있습니까?" 
"내가 청주에 있을 때 도포를 하나 만들었는데 그 무게가 7근이었다."
숭산스님(중국)이 그 말을 듣고 방망이를 내리치며
 "그때 만일 내가 그곳에 있었다면 이 방망이로 한 대 갈겨주었을 것이다.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이것이 7근이다 하면 그만이지. 
'청주에서 옛날에 만들었다.'하는 잡화로 시간을 끌 필요가 있는가 말이다." 하였다.
생각이 없어진 사람에게는 있다 없다라는 말이 통하지 않게 되어 있다. 
이 경계를 증득하여야 180도 경계에 올라오는 것이다. 

 
2, 세가지 물건(三物)
 
부처님 당시에 일곱 분의 어진 여자들이 있었다. 
이분들은 요즘 관음회니 지장회니 하는 것처럼 회를 조직하여 매월 
서로 법문을 듣고 불공을 드리고 스님들을 받들어 섬겼는데, 
하루는 시다림(屍多林)하는 곳을 구경가게 되었다.

인도에서는 장례를 네 가지로 하고 있는데 
첫째는 매장(埋裝)으로 시체를 땅에 묻는 것이고,
둘째는 화장(火裝)으로 시체를 불에 태우는 것이며, 
셋째는 수장(水裝)으로 시체를 물에 넣어 물고기들에게 그 몸을 보시하는 것이고, 
넷째는 임장(任裝)으로 시체를 숲 속에 버려 짐승들에게 보시하는 것이다.

여기서 시다림이란 시체가 많은 숲이라는 말이므로 임장을 하는 장소를 말한다. 
대개 임장을 하는 장소에서는 시체를 찢어 나뭇가지에 걸어 먹게 하기도 하고 
그대로 놓아 두어 그냥 뜯어먹게 하기도 한다.
7현녀들이 시다림 장소에 가다가 보니 그 근처에 아주 맑고 깨끗한 뼈가 한 무더기 있었다. 

"이 뼈의 주인은 어디에 갔을까?" 
한 선녀가 그 머리뼈를 가리키며 말했다. 
"글쎄." 
그 순간 7현녀가 똑같이 도를 깨쳤다. 
그런데 그때 하늘로부터 이상한 광명이 쏟아지더니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
하늘음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이 7현녀는 그대로 하늘 나라로 올라갔다. 
하늘나라에 가니 범천(梵天)이 물었다. 

"무엇이고 원하는 것이 있으면 저희들이 원하는 대로 대령하겠사오니 말씀하십시오."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필요치 않습니다." 
"하지만 저희들이 현녀들을 통하여 복을 짓고자 하니 사양하지 마시고 말씀하십시오." 
그때 한 선녀가 말하였다.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려면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어떤 세 가지입니까?" 
"첫째는 음양이 없는 땅덩어리 하나와 둘째는 뿌리 없는 나무 하나, 
셋재는 메아리가 나지 않는 산골이 필요합니다.
" 범천왕이 이것을 구하기 위하여 3천 대천세계를 분주하게 돌아다녔으나 
결국 구하지 못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고민하다가 부처님께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초지보살(初地普薩)은 알 수 없고 십지(十地)이상이 되어야 
이를 구할 수 있느니라. 문수,보현,관음 세 가지가 그들인데 이것은 
남에게 구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구하여야 하느니라." 

범천은 그때 겨우 4지보살이었다. 
4지보살이 어떻게 180도의 경지에서 270도 경지를 구할 수 있겠는가? 
이것을 구해 얻은 사람은 270도 경지를 개척하는 것이니 여러분은 
이것을 반드시 구해서 7현녀 보살들께 공양하여야 할 것이다. 

 
 
3. 여여한 경지(如如地)

 
여여지는 360도의 경계이다. 대자연에 돌아가서 갈 것도 없고올 것도 없는 
경지를 개척한 곳이다. 
그 경지야말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봄이 오면 풀은 저절로 나는 것이고              春來草自生 
청산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며                      靑山自不動 
백운은 바람따라 이리저리 흘러가는 것이다. 白雲自去來 


봄이 오면 풀이 저절로 나므로 중생이 오면 근기를 따라 대접하고, 
청산은 동요가 없으므로 마음은 동요가 없다. 
동요 없는 마음이 바람을 만나면 흰구름 처럼 인연 따라 동서로 윤회한다. 
옛날에는 가고 싶지 않는 곳에 억지로 끌려 다녔고, 
나고 싶지 않는 곳에도 억지로 나서 살고 싶지 않은 삶을 살았는데 
이제는 그 입을 마음대로 돌리고 다니면서 삼계의 귀한 손님 노릇을 한다.

지대(地帶)는 같은 제로 지대지만 불청객이 되어 눈치보고 살아가는 인생과 
귀객이 되어 대접받고 영향력을 미치는 인생과의 차이에는 360도의 차이가 
나는 것이다. 굴리느냐, 구르느냐, 그대들은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가?
 마장동 도살장에 가보면 수 없는 소들이 "음매 음매" 소리를 지르며 
눈물을 흘리고 찾아온다. 제 발로 걸어오는 것이 아니라 새끼줄에 묶여 매를 
맞으며 찾아온다. 일평생 여물을 먹고 논과 밭들을 쏘다니며 갖은 고통을 
겪었던 소들이 이제 마지막 몸바칠 곳을 향해 보보등단(步步登檀)한다.

그러나 어떤 소는 대담하게 매를 맞을 필요도 없이 제 발로 걸어 들어가 
기꺼이 목숨을 바친다. 죽지 않으려 몸부림친다고 죽지 않는 것이 아닌데 
죽는 마음, 그것 하나 때문에 공포의 눈물이 육신을 적신다.
가련한 인생, 이것이 제로 지대의 숫자 1의 인생이다. 
시다림에 나아가 서기방광을 하고 하늘에 올라가 범천왕을 교화한 7현녀는
 270도에 360도를 보낸 인생이다. 얼마 있으면 그들은 나는 줄도 모르게
 봄 따라 나서 바람 따라 자거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4. 돌이켜 보라(光)
 
돌아보아야 할 일이다. 과연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문자에 팔리고 이름에 팔리고 재산에 목 매인 인생들은 분별 속에서 죽어간다. 
그러므로 조주 스님은 불법을 물어오는 사람들에게 차나 마시고 가라고 하였다. 

"스님, 부처가 무엇입니까?" 
"차나 마시고 가게." 
"스님, 마음이 무엇입니까?" 
"차나 한 잔 마시고 가게." 
"도가 무엇입니까?"
"차나 한 잔 마시게."

아니면 불법을 물을 때마다, "다리 밑을 내려다 보라"고 하였던 것이다.
 네 앞도 모르는 놈이 부처는 알아 무엇하며 불성은 알아 무엇하려는 것이냐는 말이다.
돌아볼 일이다.
나의 다리 밑을. 

 
 
5. 인생의 길이란?(人生)

 
인생이 어느 곳으로부터 와서 어느 곳으로 가느냐 하는 문제는 동서고금 
모든 사람들의 화제였다. 그러나 우리의 고인 가운데 나옹스님의 누님이 있었다. 
동생에게 염불을 배우고 난 후 스스로 한 글귀의 시를 읊으니 다음과 같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이여   
날 때는 어느 곳으로부터 왔고   
갈 때는 어느 곳으로 가는가   
나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일 듯하고   
죽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스러지는 것 같네   
뜬구름은 자체가 실이 없나니   
생사 거래도 모두 이와 같도다   
홀로 한 물건이 있어 항상 홀로 드러나   
담연히 생사를 따르지 않는다네.   



참으로 명시다. 나는 것을 한탄하는 것도 아니고 죽는 것을 슬퍼하지도 않고 
오고 가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또한 그 가운데 생사 없는 도리를 보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시를 읽고 잘 되었다, 못되었다 평가 할 것이 아니라 
이 속에 들어 있는 문제 하나를 풀지 않으면 안 된다. '홀로 한 물건이 있어 
항상 드러나 생사를 따르지 않는다.'하였는데 '그 생사를 따르지 않는 당연한
 한 물건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를 아는 자는 뜬구름을 원망하지 않으리라. 
눈물을 흘리고 통곡하지 않으리라. 만나고 헤어짐을 기약하지 않으리라. 
기약이 없는 세계에 나아가려면 바로 그것을 보라. 그것을 보는 자가 곧 부처님이니라.


 

6. 보는놈이 곧 여래다.(來)
 
그러면 무엇을 본다는 말인가? 저 담연한 일물을 생각하는 그 놈을 바로 보아야 한다. 
그러면 그것이 본다고 보아질 수 있는 물건인가? 아니다, 아니다. 보려고 애쓰면 
도리어 보는 마음이 구름이 되니 그 마음가지 마저 비어 허공과 같이하면 
저절로 보이게 된다.그러므로 경에 이렇게 이르고 있다.



만일 부처님의 경계를 알고자하면   
마땅히 그 뜻을 허공과 같이 하라   
멀리 망상과 모든 취(趣)를 여의면  
마음가는 곳에 걸림이 없으리라.  


망상이란 속으로 온갖 분별과 시비를 일으키는 것이고 모든 취(趣)는 겉으로 
받아들이는 온갖 세계의 일들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달마 대사는 
'안으로 헐떡거리는 마음을 쉬고 밖으로 모든 인연을 쉬라' 한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 것도 하지 말고 백치처럼 우두커니 앉아 있으라는 말이 아니다. 
들어도 들은 바 없고 보아도 본 바 없는 가운데서 자기 일을 충실히 하면 된다.
 충실하되 보는 놈, 듣는 놈, 먹는 놈, 입는 놈, 그 놈을 똑똑히 보면 그대로 
여래가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대의 마음을 허공과 같이 하였는가?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면 다시 한번 내가 붙이는 시 한 수를 들어 보라.



이 정각의 성품은   
위로 모든 부처님들로부터   
아래로 6범에 이르기까지   
낱낱이 당당하게   
뚜렷 뚜렷히 구족하여   
티끌마다 다 통하고   
물물 위에 나타나   
닦을 것 없이 성취되어  
요요명명하다.   


언제나 깨달아 있는 우리 본래의 마음이 어느 곳에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가를 
분명히 설파한 시다. 부처님이라 하여 더하고 중생이라 하여 덜한 것이 아니라 
지옥ㆍ아귀ㆍ축생ㆍ인ㆍ천ㆍ수라 등 6범이 똑같이 낱낱이 당당하게 구족하고 있고, 
티끌ㆍ돌맹이ㆍ나무 하나하나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으니 그대로 보면 그만이지
구태여 닦고, 익히고, 이루고, 증하는 것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요요명명(了了明明)이란 또렷또렷하게 분명히 나타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을 보는 사람이 부처다.

자, 그렇다면 이 부처를 보라(주장자를 높이 드셨다.) 
보았느냐? 
(주장자를 한 번 내리치고 또 묻는다) 
들었느냐?

이미 분명하게 보고, 이미 또렷하게 들었으면,결국 이게 무엇인가? 같은가 다른가?
같다고 하여도 30방망이 맞을 것이다(三十). 왜냐하면() 할()! 3*3=9이니라(三三九).
듣는 것도 분별이고 보는 것도 분별이기 때문이다. 
같다고 하는 것도 분별이고 다르다고 하는 것도 분별이다. 같다, 
다르다 하면 3 x3=9가 되지 않는다. 
보고 듣는 것에 팔리는 사람은 불교는커녕 속법(俗法)도 제대로 얻기 어렵다. 

 
 


7. 어느곳으로 가느냐.  

옛 부처님도 이렇게 갔고   
지금 부처님도 이렇게 갔고   
그대도 이렇게 가고   
나도 또한 이렇게 갈 것이니    
어떤 물건이 부서지지 않고    
누가 길이 견고한 자이냐   
그대들은 아는가?   


이것을 아는 사람은 가고 오는 데 속지 않을 것이다.
(스님은 주장자를 한 번 친 후 말하였다) 


삼세에 모든 부처님이 일시에 성불하고   
십류군생이 한달 열반에 들었다.   

삼세제불이 일시에 성불하였다는 말은 그대가 성불하면 삼세제불이 언제나
성불 속에 살고 있는 것을 볼 것이라는 것도 되지만 이미 시간 이전에 그들은
성불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드러내어 보인 것이다. 
시간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지옥ㆍ아귀ㆍ축생ㆍ인ㆍ천ㆍ수라ㆍ성문
ㆍ 연각ㆍ보살ㆍ부처의 십류군생이 함께 열반을 얻게 되는 것이다.
개 눈에는 개만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인다는 말이 있다. 
부처님의 증과는 열반인데 제불이 일시성불하면 군생이 동일에 열반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래도 이해가 잘 안되거든 다음 글귀에 눈을 붙여 보라. 

눈 가진 돌 사람이 눈물을 흘리고   
말없는 동자가 답답해한다.   

얼마나 답답하면 돌 사람이 눈물을 흘릴고.

 
 
8. 도솔삼관

 
도솔삼관이란 도솔스님께서 제시하신 3가지 화두다. 

첫째 화두는, '발초참현 자도견성(潑草參玄 只圖見性) 
즉금상인 성재심처(卽今上人 性在甚處)'이다. '번뇌의 풀을 헤치고 도의 깊은 뜻을 
참구하여 단지 자성을 보라. 지금 그대의 진성은 어느 곳에 있는가?' 라는 말이다.

두 번째 화두는, '식득자성 방탈생사(識得自性 方脫生死)
안광낙시 작마생탈(眼光落時 作摩生脫)'이다. '자성을 알았다면 생사를 벗어나야 
할 텐데 눈빛이 떨어질 때 어떻게 생사를 벗어날고?' 라는 물음이다. 

세 번째 화두는 , '탈득생사 편지거처(得得生死 便知去處)
 사대분리 향심마거(四大分離 向甚摩去)이다. '생사를 벗어났다면 갈 곳을 
알 것인데 4대가 분리되면 어느 곳을 향하여 갈 것인가?'라는 물음이다. 

첫 번째는 자성이 있는 곳을 묻고, 두 번째는 생사탈출의 방법을 물었으며, 
세 번째는 갈 곳을 물었다. 쉽고도 어려운 질문이다. 
여기 각기 자기의 길을 모색하며 함께 갈 길을 밝혀 보라. 
이 화두는 [무문관(無門關)]48칙 가운데 제 47칙으로 널리 쓰이고 있는 화두요, 
문답이다.
그런데 도솔 스님은 다시 다음 사활구(死活句)를 놓고 여기서 
능사능활(能死能活)의 일구를 가려내라고 하였다. 


바다 속의 진흙소가 달을 몰고 가고   
바위 앞의 돌 호랑이가 애기를 안고 잔다   
철사가 금강의 눈을 뚫는데  
코끼리를 탄 곤륜을 백노가 끌고 간다.  

자, 이 가운데 어떤 글귀가 죽은 글귀이고 산 글귀인가. 
이것을 찾는 사람은 능히 죽을 때 죽고, 살 때 살아 여한이 없을 것이다. 
사람이 날 때 나서 살기도 어렵거니와 죽을 때 죽어 삶을 욕되게 하지 않기도 어렵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 있는 인생이 만일 이것을 찾지 못한다면 
영원히 죽어 다시 살지 못할 것이다. 
들어라. 여기 옛 선사의 멋진 글 한 수가 있다. 

고요한 밤 말없이 절 집에 앉았으니   
적적요요하여 본래 자연 그대로다   
무슨 일로 서풍에 임야가 움직이는가?   
푸른 하늘 기러기 소리 장천을 울린다.    

어떤 사람이 절에 살면서 밤을 맞이하였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아도 절 집은 고요한데 오가는 손님 하나 없는 절에 고요히 앉아 있는 
스님의 마음이야 오죽 적적하겠는가? 
그런데 그 적요(寂寥)는 만들어서 지어진 것이 아니라 본래 자연 그대로의 적요였다.
누구나 본래의 순수한 마음은 파도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무슨 일로 서풍이 일어 임야를 흔드느냐는 말은 달마 대사가 서쪽에서
 와서 바람 없는 물결을 일으키냐 하는 말이다. 
고요한 밤 찬 하늘에 메아리 지는 기러기 소리 (끼욱끼욱), 듣기만 하여도 가슴 속 
깊이 스며든다. 여러분, 왜 기러기가 우는데 찬 하늘에 메아리가 지는가 말해 보라. 

 
 
 

9. 실중삼관

 
고봉(高峰) 스님의 문하에 들어가면 어떤 사람을 막론하고 공부 중에 3개의 
관문을 거쳐야만 한다. 그것도 집 밖에서 부터가 아니라 집안에 들어가서다.
불교의 시험문제는 간단명료하다. 멀리 놓고 다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가슴속을 헤쳐 본다. 

첫째는 "고일당공(高日當空)에 무소부조(無所不照)한데 
인심피편운차각(因甚被片雲遮却)고?"라는 문제이다. 
즉 "밝은 해가 허공에 높이 떠서 비추지 아니한 곳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조그마한 구름의 가림을 입는고?"라는 말이다. 

둘째는 "인인유개영자(人人有箇影子)하야 촌보불리(寸步不離)라
 인시답불착(因甚踏不着)고?"란 문제이다. 즉 "사람 사람마다 모두 그림자가 
있어 한 치도 떨어지지 않는데 어떻게 밟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라는 말이다. 

세번 째는 "진대지(盡大地)가 시개화갱(是箇火坑)이라 득향삼매(得向三昧)하야 
불피소각(不被燒却)고?"라는 말이다. 즉 "온 세계가 모두 불구덩이이다. 
어떤 삼매를 얻어야 타지 않겠는가?"라는 물음 이다. 

다시 말하면, 첫째 질문은 청정본연의 혜일(慧日)이 번뇌의 구름에 피해를 
입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하는 물음이고, 
둘째는 자기문제(자기인과)를 자기가 어떻게 해결해 갈 수 있느냐 하는 물음이며, 
셋째는 생사의 불구덩이에서 어떻게 헤어날 수 있겠느냐 하는 물음이다. 

 
 
10. 그대로 부처다.(佛)

 같느냐? 다르느냐? 옳으냐? 그르냐? 너냐? 나냐? 갖가지를 묻고 갖가지를 대답하여 
그 동안 어리둥절한 천만가지 설법을 늘어 놓았다. 그러나 이것은 불법 자체가 
복잡해서가 아니라 상대쪽인간의 의식구조가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어 이것을 
놓아버리고 자기 본래의 마음에 돌아가 태평성대를 이루게 하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다.

옛날 중국에 계현(誡賢) 스님이라는 부자 스님이 있었다.
 4방8리를 가도 그의 땅을 밟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천하 인민을 다 만나도 계현스님의 복과 학(學)에 대하여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만큼 유명한 스님이기 때문에 그의 문하에는 유불선에 정통한
 수많은 학인들이 모여들었다. 

하루는 신찬(神讚)이라는 아이가 중노릇을 왔다. 와서 보니 스님의 문하가 
융성하기는 한데 진짜 법을 알고 배우는 사람은 없었다.
처음에는 기도를 드리며 의식을 익히다가 다음에는 글을 배우고 선방에 들어가 
조금 선맛을 보았다. 그런데 스님께서 하루는 부르시더니 세 명의 상좌를 앞에 놓고, 
"너는 유가에 밝으니 유교를 더욱 깊이 배워 오너라" 

"너는 도교에 밝으니 노장을 더욱 깊게 연구하여 오너라" 
하여 유교와 도교에 밝은 두 제자에게 명령하였다. 
그리고 신찬에게는 선방에 가서 도를 공부하여 앞의 두 제자와 함께 천하의 
자웅을 가려보라 했다. 그러면서 스님은 3년 동안 쓸 돈을 하루에 한 냥씩 쳐서 
1천 냥이 넘게 주었다. 그러나 신찬은 마음 공부를 하러 가는 사람이 돈을 짊어지고 
가면 무거워서 도중하차하기 쉬우니 그냥 가겠다 하여 극구 사양하였다.

그리하여 세 사람은 각기 스승을 찾아갔는데 신찬은 그때 백장산의 
도인 백장스님을 찾아갔다.
백장 스님은 '일일부작 (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 이라는 엄격한 
청규를 만들어 놓고 아침 저녁 예불 이외에는 쉴 틈 없이 일을 시켰다. 

번뇌가 일어 날래야 일어날 틈이 없었다. 
3년을 지내고 돌아오니 그의 도반들도 모두 돌아와 있었다. 
유교를 공부한 사람에게 물었다. 
"너는 그 동안 무엇을 배워 왔느냐?" 
"삼강오륜(三綱五倫)으로 수신제가(修身齊家)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도리를 배웠습니다." 
도교를 공부한 상좌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무엇을 배워왔느냐?" 
"단전복기(丹田腹氣)로 신선이 되어 가는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유교에는 내생(來生)법이 있던가?" 
"예. 공자님께서는 전생 이야기나 후생 이야기는 일체 하시지 않았습니다,
 단지 죽음 이전에 선행을 하여 자손만대에 덕을 심어 갈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노자님은 신선 이외의 말은 하지 않던가?"
"복이 다 하면 타락하여 다시 인간이 되게 되는 것이니 타락하지 않도록 
마음을 무위자연(無爲自然)하게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신찬은 무슨 공부를 하였는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그저 밥 먹고 일만 부지런히 하다가 왔습니다."
"그래? 하기야 저 사람들은 돈을 짊어지고 갔으니 돈 값을 하느라고 
애를 썼겠지만 신찬이야 빈 몸으로 갔으니 올 때도 가볍게 올 수밖에." 
그리고선 자리를 물렸다. 그런데 그 뒤로도 스님은 매일같이 앉아서 책을 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하루는 목욕물을 데워 목욕을 하시다가 신찬을 불렀다.

"오늘은 네가 나의 등을 밀어라."
"예." 
신찬은 목욕탕에 들어갔다. 
스님은 육덕이 좋았다. 

밝고 밝은 살빛에 살이 피둥피둥 쪄서 볼품이 없었다.
신찬은 등을 문지르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법당은 좋다만은 부처가 영험이 없도다." 
스님이 듣고 말하였다.

"영험은 없어도 방광(放光)은 잘한다." 
서로 웃고 목욕을 마쳤다. 목욕을 하고 나서 한숨 주무시더니 일어나서 글을 보고 있었다. 
마침 그때 벌 한 마리가 방안에 들어왔다가 나가지 못하고 창에 부딪혀
 방바닥에 떨어지곤 하였다. 
신찬이 말하였다.

"빈 구멍을 즐겨 찾지 못하여 창에 부딪쳐 떨어지는 어리석은 놈아. 
백 년을 고지를 뚫고자 한들 어느 날 벗어날 기약이 있겠느냐?" 
이 소리를 듣고 스님이 고개를 들어 물었다. 
"너 무엇이라 하였느냐?" 

"벌이란 놈이 방에 들어와서 나가지 못하여 이런 시를 하나 지었습니다."
"그래, 무슨 시냐? 한번 보자꾸나."
"공(空)의 문으로 나갈 줄을 모르고 크게 어리석어 창만 뚫으려하고 있구나. 
100년을 낡은 종이 만 뚫으려 하니 어느 세월에 머리가 나가리오" 
이 이야기를 듣고 스님은 그 자리에서 깨쳤다.
"너 백장 스님에게 가서 일만 하였다고 하더니 진짜 공부하고 왔구나!" 
하면서 칭찬하였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진짜 백장 스님의 법문을 들으면 크게 놀라실 것입니다."
"뭐, 백장 스님 법문이라고. 그 법문은 어떤것이냐? 어서 한번 들어보자."
"그거야 그렇게 쉽게 들을 수 있습니까? 법답게 들어야지요." 
스님은 곧 북을 치고 종을 쳐서 대종은 모아 법좌를 마련하고 상좌를 높이 올려 모셨다. 
그리고 청법계를 하여 큰절로 3배를 하였다. 상좌에게 스님이 절을 한 것도 
기이하지만 스승의 절을 받고 있는 상좌 또한 기이하였다. 
그러나 신찬은 이미 신찬이 아니다. 
오늘은 백장을 대신하여 설하는 법문이라 바로 백장이기 때문이다. 
신찬이 소리높여 외쳤다.

"신령스러운 빛이 홀로 드러나 육근, 육진의 경계를 벗어나 있도다. 
그 드러난 참모습이여, 문자에 구애함이 없어라 . 
참된 성품은 물듦이 없어 본래부터 스스로 원만히 이루어져 있으니 
단지 망녕된 생각 만 여의면 그대로 부처로다." 

이 얼마나 간결하고 적절한 시인가? 스님은 이 말씀을 듣고 그대로 망연을 
여의고 그대로 부처가 되었다. 그리하여 스승 상좌와 함께 백장의 법을 이었으며, 
후세 많은 구도자들의 좋은 본이 되었다. 



4대가 각기 꿈 가운데서 흩어지고   
육진.심식이 모두 공하도   
부처님과 조사들이 깨달은 곳을 알고자 하는가   
서산에 해 떨어지면동산에 달이 솟느리라.   

나를 알고 나를 움직이는 놈을 알았으면 자연에 돌아가는 것은 정한 이치다. 
천하 귀인도 땅 속에 들어가면 한줌의 흙이 되고 천하미인도 코 밑에 숨결 이지면
 불러도 대답 없고 소리쳐도 듣지 못한다. 
누가 해 떨어지면 달뜨는 이치를 알아 흙밥 속에서 회광반조(廻光返照)의 불조가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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